가을은 누군가에게 이별의 계절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낙엽이 흩날리는 시기에 걷는 여행은,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추고 내면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입니다. 추풍령은 그런 가을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낙엽을 밟으며 느릿하게 걸었던 추풍령의 골목과 산길, 그리고 그 안에서 마주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가을의 문턱에서 마주한 첫 장면
기차에서 내려 추풍령역 앞에 섰을 때, 처음 느껴진 건 ‘조용함’이었습니다. 도시의 소음이나 익숙한 광고판 대신, 맑은 하늘 아래로 붉고 노란 나뭇잎들이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길가에 늘어진 단풍나무와 은행잎들은 낙엽을 흩뿌리며 이미 가을의 중심으로 나를 이끌고 있었죠. 한 손에 카메라를 들고, 다른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골목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바람 한 줄기에도 사락사락 나뭇잎이 떨어지고, 그 위를 밟을 때마다 나는 계절의 감촉을 오롯이 발끝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추풍령은 이름처럼 바람이 부는 고개였지만, 그날의 바람은 날카롭지 않고 오히려 잔잔했습니다. 뺨을 스치는 바람에는 이른 아침 특유의 냄새가 실려 있었고, 그 속에는 흙냄새와 낙엽 냄새, 그리고 어딘가에서 피워 오르는 장작 타는 냄새가 섞여 있었습니다.
낙엽 아래 흐르던 조용한 생각들
추풍령을 여행하며 가장 자주 하게 되는 일은 '걷기'입니다. 특별한 명소나 즐길 거리가 많지는 않지만, 그 대신 골목과 숲길, 기차역 주변의 산책로에는 고요함이 흐르고 있습니다. 작은 마을 안쪽을 걷다 보면 오래된 담장, 정갈하게 쌓아올린 돌담길, 그리고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김장을 하는 어르신들의 풍경이 이어집니다. 그런 일상의 장면 속을 걷는 동안, 복잡했던 생각들은 어느새 정리되어 갔습니다. 길을 걷다가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잠시 숨을 고르면, 바람 소리와 새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 고요 속에서 나는 멀리 있던 감정들과 다시 가까워졌고, 지금껏 놓치고 있던 것들을 다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낙엽을 하나 집어 들고, 그 결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람의 인생도 이런 가을잎처럼 언젠가는 바람에 흩날릴 운명이겠지만, 그 안에는 색과 결, 지난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 마음을 울렸습니다.
노을로 마무리된 하루, 여운을 남긴 고개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추풍령의 빛은 조금 더 따뜻해졌습니다. 금빛으로 물든 나뭇잎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산등성이 위로 길게 그림자가 늘어졌습니다. 노을은 바람보다도 빠르게 마을을 덮었고, 하늘은 붉게 물들며 하루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다시 기차역 근처로 돌아와 벤치에 앉았습니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조용히 독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급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시끄럽지 않았습니다. 그 풍경 속에서 나 역시 아무 말 없이 하루를 떠올렸습니다. 걸었던 길, 들었던 소리, 마음에 스쳐간 생각들. 추풍령은 그 자체로 감정을 비워내고 다시 채우는 공간이었습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고요하고 섬세하게 여행자의 마음에 잔상을 남기는 곳. 저녁 기차가 다가올 때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몇 장의 사진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진짜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은 그 사진 속 장면이 아니라, 그 시간 동안의 온도와 감정일 것입니다.
낙엽을 밟으며 걷던 추풍령에서의 하루는, 단순한 여행이라기보다 감정의 순례 같았습니다. 한 계절이 끝나기 전,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이 조용한 고개를 한 번쯤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곳에는 말 없이도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풍경이 있고, 걷기만 해도 충분한 위로가 있는 길이 있습니다. 낙엽이 흩날리던 그 길 위에서, 나는 내가 놓쳐온 것들을 천천히 되짚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 하루가 나에게 남긴 여운은, 지금도 조용히 마음속을 걷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