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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개 속을 걷다, 아침의 소양강

by manostarb 2025. 6. 26.

보랏빛 안개가 너울거리는 들판 위로 여명이 천천히 퍼지며, 태양빛이 부드럽게 스며든다. 새벽의 서리가 남긴 촉촉한 땅 위에 드문드문 솟아난 들풀과 야생화들이 은은한 실루엣을 이루고, 빛줄기가 안개를 가르며 마치 꿈결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자연이 잠에서 깨어나는 고요하고도 경이로운 순간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담긴 사진.

 

소양강의 아침은 안개로 시작됩니다. 그날도 해가 채 뜨기 전, 나는 조용히 숙소를 나섰습니다. 바람은 거의 없었고, 공기는 서늘했습니다. 길을 따라 내려가자 강가에는 이미 은빛 물안개가 부드럽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강물 위로 낮게 깔린 안개는 마치 시간을 멈춰 세운 듯한 정적을 만들어주었고, 그 풍경 속을 걷는 나는 어느새 현실의 시간에서 멀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소양강에서 마주한 아침의 감각을 따라가 봅니다.

안개에 덮인 물결, 말없이 흐르는 고요함

소양강은 이른 시간부터 깨어 있었지만, 그 움직임은 아주 조용했습니다. 물 위를 타고 내려오는 안개는 사람의 숨소리보다도 가볍게 흘렀고, 주위의 풍경을 흐릿하게 감싸 안았습니다. 다리 위를 걷다 보니 멀리 소양강댐의 윤곽이 보였고, 가까운 수면 위로는 작은 새들이 물결을 따라 유유히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강가 산책로를 걷는 동안 마주친 사람은 몇 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조용히 걷고 있었고, 그 조용함이 오히려 서로를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말 대신 서로의 발소리, 그리고 안개를 가르는 발걸음이 이 아침의 대화를 대신했습니다. 공기 중에는 물기와 풀냄새가 섞인 상쾌한 향이 떠 있었고, 그 안에서 숨을 깊게 들이마시니 몸속까지 서늘하게 정화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매 순간 눈앞의 풍경이 조금씩 바뀌는 것도 소양강 아침의 매력입니다. 해가 올라오면서 안개가 천천히 걷히고, 그 안에 숨어 있던 수풀과 강의 반짝이는 결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풍경보다 감정이 먼저 남는 산책

이 산책은 단지 ‘어디를 본다’는 목적이 아니라 ‘무엇을 느낀다’는 흐름으로 이어졌습니다. 나무 벤치에 잠시 앉아 숨을 고르다 보니, 어제의 복잡했던 감정들이 하나둘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안개 속을 걷는다는 건 어쩌면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흐릿한 풍경 속에서 오히려 내면은 또렷해지고, 조용한 시간 안에서 내가 무심코 지나쳤던 마음의 결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특별한 음악도, 대화도 없이 이어지는 이 시간은,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결코 같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혼자이기에 더 자유롭게, 더 깊이 머물 수 있었던 공간. 그 공간이 주는 감정은 말로 다 담기 어려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감정의 조각들 같았습니다.

안개 너머로 떠오르는 빛, 다시 시작되는 하루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동쪽 하늘에 희미한 햇빛이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구름과 안개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강물 위를 천천히 물들이고, 그 순간 풍경은 전혀 다른 얼굴로 바뀌었습니다. 안개 속에 숨어 있던 나무의 윤곽이 또렷해지고, 멀리 산의 능선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변화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진행되었고, 나는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햇살이 얼굴에 닿을 무렵, 바람이 조금 더 강해졌고 안개는 점점 물러났습니다. 이윽고 풍경은 맑아졌고, 아침은 완전히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개 속에서 보낸 시간은 마치 꿈을 꾼 것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짧았지만 깊었던 한 장면이자,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사이에서 꼭 필요한 여백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소양강의 물안개 속을 걷는 일은, 자연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마주하는 조용한 의식과도 같았습니다. 여행지에서 흔히 느끼는 감탄이나 흥분과는 다른 종류의 감동이 있었고, 그 감동은 오래도록 잔잔하게 가슴 속에 머물렀습니다. 앞으로 다시 누군가에게 소양강을 이야기하게 된다면, 나는 그곳의 풍경보다도 아침 공기 속에 스며 있던 고요함을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그 고요함이 바로, 이 도시가 내게 건넨 가장 진한 인사였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