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을 찾은 건 여름이 막 시작되던 유월이었다. 햇살은 눈부셨고, 하늘은 높았으며, 바람은 어느 골목 어귀에서 조용히 머무르고 있었다. 관광지로 알려진 유명한 해변이나 카페 거리보다는, 조용한 골목과 느린 걸음이 어울릴 법한 계절이었다. 해가 높이 떠 있는 시간, 군더더기 없이 맑은 그 날의 강릉은 왠지 모르게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만들었다. 유월의 바람이 스친 강릉의 골목에서 나는 오랜만에 아주 단순한 여행의 감정을 되찾았다.
골목을 따라 걷는 시간, 느리게 흐르는 풍경
강릉 중앙시장에서 멀지 않은 작은 주택가 골목은 바다도, 카페도 보이지 않지만 여름의 색과 온도를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낮은 지붕, 오래된 대문, 담장 너머로 피어난 꽃들, 그리고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 그 안에서 유월의 바람은 아주 조심스럽게 불고 있었다. 그 골목을 따라 걸을 때, 내 안의 속도도 느려졌다. 누군가의 삶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집들 앞을 지나며, 낯선 도시에서 누군가의 일상과 맞닿는 기분이 들었다. 거리의 이름도, 어떤 목적지도 정해두지 않았지만,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이따금 작은 카페가 나타났고, 그 앞 테라스에 나란히 놓인 의자 위로 햇빛이 내려앉았다. 그런 장면들은 사진보다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 순간의 공기, 그림자의 모양, 지나가던 고양이의 표정까지도. 강릉은 걷는 이에게 자꾸만 마음을 내려놓게 만드는 도시였다.
바람이 안내한 한적한 오후의 자리
걷다가 들어간 한 작은 골목 안, 의도치 않게 마주한 조용한 찻집이 있었다. 외부 간판조차 없는 그 공간은 나무와 햇빛, 그리고 바람만이 길을 알려주는 장소 같았다. 열려 있는 문 사이로 은은한 찻향이 풍기고, 실내는 서늘하고 고요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창으로 보이는 건 오직 오래된 골목 하나. 간혹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아이, 느릿하게 걷는 노부부, 그리고 멈춰 선 고양이 한 마리. 바깥세상이 잔잔하게 움직이는 동안, 찻잔 속의 차는 천천히 식어갔다. 그 시간 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핸드폰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마치 잠시 ‘멈춤’ 버튼을 누른 것처럼, 하루가 조용히 흘렀다.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더 좋았을 수도 있지만, 혼자라는 사실이 조금도 외롭지 않은 오후였다. 그런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강릉은 다시 찾고 싶은 도시가 되었다.
저녁으로 번져가는 노을, 기억으로 남은 온도
해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자, 다시 골목을 걸었다. 낮 동안의 따뜻했던 공기는 서늘하게 바뀌었고, 하늘은 노란빛에서 주홍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바람도 조금씩 색을 바꾸는 듯했다. 동네 작은 빵집에서 크림빵 하나를 사서,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길을 따라 걷는다. 찻집의 따뜻한 잔상과 방금 마주친 저녁 바람이 섞이면서 마음속 어딘가가 조용히 움직이는 느낌. 어느 벽돌 담벼락에 기대어 빵을 한 입 베어 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누군가는 바다로 향하고, 누군가는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하지만 나에겐 지금 이 순간이 여행의 정점이었다. 무엇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무엇을 남기지 않아도 오래도록 남을 것 같은 그런 하루. 강릉의 유월은 분명 특별한 계절이었다. 바람은 너무 세지 않았고, 햇빛은 유난히 따뜻했으며, 골목은 사람의 속도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여행자를 배려하는 듯한 감정으로 스며들었다.
유월의 바람이 머물던 골목에서 나는 아무 계획 없이 하루를 걸었고, 예상보다 더 많은 감정을 얻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이렇게 천천히 존재할 수 있는 하루가 있다는 건 큰 위안이었다. 지금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건 유명한 풍경이 아니라, 작고 조용한 그 골목의 공기와 빛, 그리고 바람의 결이다. 언젠가 또 강릉을 찾게 된다면, 그 골목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까. 혹은 조금 달라졌더라도, 그날의 기억은 그대로 내 마음 어딘가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