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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한옥마을 장터에서 시작된 느린 하루

by manostarb 2025. 6. 26.

붉게 물든 단풍나무 가지가 화면 위를 감싸며 자연의 화려한 프레임을 만들어내고, 그 아래로는 전통 한옥이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다. 석양빛이 산등성이 너머로 퍼지며, 푸르른 기와지붕과 울긋불긋한 단풍, 그리고 멀리 펼쳐진 안개 낀 산자락이 조화를 이룬다. 고요한 산사에서 가을의 절정을 마주한 듯한, 시간의 흐름마저 잠시 멈춘 듯한 평온함이 느껴지는 사진.

 

여행 중 어떤 날은 아주 느릿하게 흘러갑니다. 시계 대신 풍경을 보고, 목적지 대신 감각을 따라가는 그런 날. 전주 한옥마을의 장터에서 시작된 하루는 바로 그런 하루였습니다. 바쁜 도시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느린 호흡과 정겨운 온기가 골목마다 흐르고 있었고, 그 속을 천천히 걸으며 나는 일상에서 잠시 멀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전주의 한옥마을과 장터에서 시작된 그 느린 하루의 이야기를 따라가 봅니다.

아침 장터, 골목의 숨결을 따라 걷다

전주의 아침은 한옥 지붕 위로 햇살이 천천히 내려앉는 풍경으로 시작됩니다. 아직 가게 문이 다 열리기 전, 장터의 골목은 상인들의 움직임과 조용한 인사로 채워집니다. 오래된 나무 간판들, 짚으로 엮은 바구니, 손때 묻은 좌판 위에 차려진 갓 따온 채소와 정성스레 만든 떡들. 그 풍경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시장 안을 걷는 내내 나는 말없이 주위를 둘러봤습니다. 정갈하게 묶인 부추, 미소로 맞아주는 할머니의 손짓, 어깨를 맞댄 채 나란히 물건을 고르는 사람들. 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을 넘어서, 오래된 기억과 정겨운 일상이 스며 있는 장소라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이른 아침의 공기 속에는 막 끓인 국물 냄새, 갓 구운 전의 고소함, 그리고 사람들의 조용한 수다가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한 모퉁이에서는 여행자가 떡 한 점을 받아 들고 미소 짓고 있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습니다. 전주의 장터는 낯선 이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힘이 있었습니다.

한옥길을 따라 이어지는 조용한 시간

장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한옥마을 안쪽 골목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관광객이 붐비는 메인 거리보다는 그 옆으로 난 좁은 골목이 더 마음을 끌었습니다. 고요한 길을 따라 나무 대문 앞에 놓인 돌멩이, 대청 위로 드리운 햇살, 창틀 사이로 흔들리는 커튼이 이어집니다. 걸음이 느려지고, 눈이 바닥의 그림자 하나하나를 따라갑니다. 한옥 사이로 이어진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작은 찻집이나 공방이 불쑥 모습을 드러냅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주인이 차를 우리는 소리가 나고, 천천히 퍼지는 향기가 실내를 가득 채웁니다. 그곳에서는 시간을 재지 않습니다. 그저 머무르고 싶을 만큼 머무는 것이 룰처럼 느껴집니다. 찻잔 위로 올라오는 김, 마루 아래 비치는 햇빛, 그리고 옆자리 사람의 낮은 웃음소리까지도 하나의 풍경이 됩니다. 혼자지만 외롭지 않고, 말이 없어도 풍성한 시간. 그런 한옥의 정취 속에서 나는 진짜 여행의 호흡을 다시 찾은 듯했습니다.

느리게 물드는 저녁, 하루의 온기

오후가 깊어질수록 전주의 빛은 더 따뜻해졌습니다. 노을이 한옥 지붕을 물들이고, 거리는 조금씩 조용해지기 시작합니다. 낮의 활기 뒤로 남은 잔열처럼, 거리는 여전히 생기 있었지만 그 속도는 분명 달라졌습니다. 천천히 흘러가던 하루의 끝은 경기전 앞 잔디밭에서 맞이했습니다. 나무 그늘 아래 앉아 한참을 하늘만 바라보았습니다. 사람들은 피크닉 매트를 펴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아이들은 소리 없이 뛰어놀았습니다. 가끔 어디선가 풍금 소리 같은 기타 연주가 들려오고, 낙엽 하나가 바람에 날아올라 내 발 앞에 떨어집니다. 그 순간, 이 하루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특별한 장소를 간 것도, 특별한 음식을 먹은 것도 아닌데 마음은 꽉 찬 느낌. 아마도 그것은 공간이 주는 온기와, 시간에 쫓기지 않았던 감정 덕분이었을 겁니다.

전주 한옥마을의 장터에서 시작된 하루는, 누군가의 일상 속에 조용히 스며드는 여행이었습니다. 빠르게 지나치는 관광이 아니라, 천천히 머무는 경험. 지금도 생각하면 떠오르는 건 사람들의 미소, 나무의 그림자, 그리고 골목을 타고 흐르던 정다운 공기입니다. 그날의 하루처럼, 느리게 흘러도 괜찮은 시간이 삶에 한 번쯤은 필요합니다. 전주는 그 하루를 가능하게 해준, 조용하지만 따뜻한 도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