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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없는 풍경을 따라간 영덕에서의 하루

by manostarb 2025. 6. 26.

도심 속 한복판, 회색 건물 위로 거대한 대게 조형물이 압도적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건물 외벽을 덮을 만큼 크고 정교한 이 모형은 가게의 콘셉트를 명확히 드러내며, 관광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간판에는 '대게궁'이라는 글자가 웅장하게 새겨져 있고, 아래에는 ‘Take out Coffee’라는 간단한 문구가 병치되어 있어 이색적인 조화를 이룬다. 전체적으로 해산물 음식점 특유의 개성과 과감한 디자인이 인상 깊게 다가오는 사진.

 

언제부턴가 여행은 유명한 장소, 꼭 가봐야 할 명소들을 중심으로 계획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정해진 풍경’이 아닌,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곤 합니다. 영덕에서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 길, 검색창에 이름조차 뜨지 않는 골목과 바닷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예상치 못한 감정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정보보다 감각에 의지했던 하루, 영덕에서 만난 ‘지도 밖의 풍경’들을 나눠봅니다.

정해진 목적지 없이 걷는 아침

영덕에 도착한 아침, 특별한 계획은 세우지 않았습니다. 숙소에서 나온 뒤, 그저 바다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을 뿐입니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대게 거리도 좋지만, 더 깊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 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한적한 마을길을 걷다 보니, 오래된 방앗간과 작은 슈퍼가 번갈아 나타났고, 할머니 한 분이 마당에 빨래를 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조용한 동네의 숨소리처럼 느껴지는 그 풍경들 사이에서 문득, 여행의 진짜 시작이 느껴졌습니다. 햇살은 옅었고, 바람은 아직 선선했습니다. 바다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풍겼고, 갈매기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건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었지만, 그 조용함과 현실감이 오히려 마음을 단단하게 채워주었습니다.

지도에 없는 길 위에서 마주친 풍경

영덕의 해안도로는 굽이굽이 이어져 있지만, 조금만 길을 벗어나면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들이 나타납니다. 낮은 둔덕 위에 자리한 마을길, 오래된 어선이 묶여 있는 작은 포구, 누군가 그려놓고 잊고 간 벽화, 그리고 무심히 열린 대문 너머 고요한 정원. 이런 풍경들은 포털 검색에는 나오지 않지만, 실제로 눈앞에 마주했을 때는 그 어떤 포인트보다도 진하게 다가옵니다. 마치 나만 아는 장면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 지도 없이 걷는 일의 묘미는 바로 이런 우연과 마주하는 데 있습니다. 한참을 걷다가, 돌담 아래에 피어난 들꽃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꽃 한 송이, 바다 너머로 부서지는 파도, 그리고 길모퉁이에 놓인 낡은 의자. 이 모든 것이 마치 누군가의 삶을 엿보는 듯한 친밀한 풍경처럼 느껴졌습니다. 카메라에 담기보다는 마음속에 오래 남기고 싶은 장면이란 이런 것이겠지요. 혼자 걷는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풍경을 더 깊고 조용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하루의 끝, 바다 너머로 넘긴 감정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영덕의 바닷길은 한층 더 고요해집니다. 유명한 블루로드 트레킹 코스도 좋지만, 그 너머의 이름 없는 바닷가에 서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어집니다. 파도 소리는 낮보다 더 낮게 속삭이고, 하늘은 주황빛과 보랏빛을 오가며 바다 위로 천천히 내려앉습니다. 나는 한참 동안 돌 위에 앉아 하늘과 바다의 색이 바뀌는 걸 지켜봤습니다. 그동안 했던 생각들이 바람을 타고 멀어지는 느낌, 복잡했던 마음이 잔잔한 수면처럼 가라앉는 감정. 영덕의 저녁은 그렇게 조용하게 하루를 마무리짓게 해줍니다. 돌아오는 길, 마을의 가로등은 하나씩 불을 밝히고, 어둠은 그 풍경을 더 따뜻하게 감싸 안습니다. 그날의 기억은, 유명한 장소에서 찍은 인증샷이 아닌, 길가 돌담의 결, 바닷바람의 방향, 벤치에 묻은 햇살로 남았습니다.

지도에 없는 풍경은 그래서 더 특별합니다. 정보 없이도, 계획 없이도, 그 자체로 충분한 감정과 이야기를 품고 있으니까요. 영덕에서의 하루는 그렇게 나만의 풍경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이곳을 찾더라도 똑같은 길은 걸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매번 달라지는 바람의 방향처럼, 매번 새로운 우연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오늘 하루, 길 위에서 마주했던 그 모든 장면은 언젠가 꺼내 보기 좋은 기억으로 남아 오래도록 내 안에서 머무를 것입니다.